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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라고 뽑아줬더니 맨날 싸움박질이나 하고 말이야!"

라는 말을 정말 흔하게 너무 많이 본다. 정쟁만 하는 행태를 꼬집는다는 명목으로 정말 한국언론을 의인화하여 재운 다음 잠들었을 때 툭 건드리면 잠꼬대처럼 줄줄 읊을 것 같은 문구이다. 민생은 힘든데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 어쩌고... 하는 관용어구들. 


하지만 나는 늘 “국회의원은 일도 안 하고 싸움만 한다”라는 말은 아예 성립이 불가능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 대신에 이렇게 주장한다. 

“국회의원의 일은 싸움이다.” 


각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의사를 대표하며,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양심에 따라 국회에서 싸우는 것이 일이며 그러기 위해 공부와 연구도 한다. 국회가 해야 하는 일, 즉 입법과 예결산을 통한 행정부 견제와 감시는 좀 거칠게 요약하면 행정부와의 싸움이다. 이건 정말 중요한 싸움이다. 이 중요한 일들을 너무 소수가 담당하면 그만큼 행정부는 덜 촘촘한 감시 아래 멋대로 공권력을 행사해버린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언론에서 이것도 관용어구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한국의 대통령제를 미국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맞는 말이다. 미국의 연방행정부는 법안제출권이 없다. 원하는 법안이 있다면 의회에 열심히 로비를 해야 한다. 예산도 법안의 형태로 순전히 연방의회의 의결 여부에 달려 있다. 12월 31일까지 예산법 처리가 안 되면 미국의 연방정부는 다음년도 1월 1일부터 문을 열지 못 한다. 그런 반면 한국의 헌법에서 규정하기로는 심사하고 통과하는 것은 국회만 가능하지만 엄연히 행정부도 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너무 많은 행정부 위임입법(무슨무슨 시행령과 시행규칙들), 예산안 원안(미국과 달리 법안이 아닌 예산안)을 정부가 제출하는 것 등은 대한민국이 삼권분립이 되어 있다곤 하지만 굉장히 강력한 행정부 중심의 체계임을 보여준다.



그런 데다가 전에 알아본 것처럼 국회의원도 모자라고 국회 내 보좌조직도 너무 규모가 작고 부족하다. 그래서 그 모든 일에 갈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게 바로 보좌진이다. 근데 보좌진마저 “국회의원의 특권”이라며 한 명 늘리는 게 쉽지 않다. 제15대 국회까진 정규 보좌진이 5명이었다가 제16대에 1명 늘고 제18대에 1명 늘어 7명, 제21대에 1명이 더 들어 8명이 됐다.(물론 여기에 인턴 1명을 더 쓸 수 있다.) 근데 국회가 생산하는 법안은 17대 이후로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과거보다 법제실에 대한 입안 의뢰가 전자문서를 통해 쉽게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적에 신경을 쓰는 의원도 생겼고 보좌진이 정치적 후계자나 가신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입법과 정책업무를 보좌하는 사람들로 바뀌면서 생겨난 변화이고 또한 17대부터 비례대표 도입, 진보정당 원내 진입의 영향 등으로 다양한 정책수요가 가시화한 때문이다.


언론은 이번 국회는 법안을 통과시킨 게 몇%밖에 안 된다며 정치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데 가장 앞장서지만 퍼센티지가 그렇게 낮은 건 발의법안이 그렇게 많다는 뜻도 되는데(분수의 분모가 그만큼 큰 건데) 그런 건 잘 알려주지 않는다. "국회 무슨무슨 위원회는 얼마얼마 기간 동안 법안을 한 건도 통과 안 시켰습니다, 국회의원 세비는 얼마얼마입니다" 같 언론보도를 숱하게 본다. 하지만 왜 어떤 의원들이 무슨 악법 처리를 막기 위해 용쓰며 다른 법안을 볼모로 삼아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요즈음 같은 특수한 시즌이 아니면 언론에 나오는 정치뉴스는 대개 정치'스포츠' 뉴스이고 정책적인 내용은 거의 중요하게 보도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이 일을 안 하고 보좌진이 쓸데없이 대우 받는다."는 고정관념은 누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누구에게 유리한 프레임일까.


유럽의 중세를 배경으로 한 미드, 영드나 HBO 시리즈 '왕좌의 게임'을 보면 결투재판이라는 걸 한다. 증거를 제시하고 재판관이 잘잘못을 가리는 그런 재판이 아니라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이기는 사람의 결론만 남고 지는 사람은 그냥 죽어서 사라지는 재판이다. 이 결투에 재판의 당사자는 직접 결투에 나설 수도 있고 자기를 대신해 싸워줄 용사를 내세울 수도 있는데 그 때 내세우는 용사를 영어로 'Champion'이라고 한다. 소리 지르는 네가, 음악에 미치는 네가, 인생 즐기는 네가 바로 챔피언이라던 그 챔피언. 

나는 시민이 국회의원이 싸우는 것을 '내 대신 결투재판에 내보낸 챔피언이 나를 대신해서 싸우는구나'라고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이 공화국의 정책결정을 놓고 쫓아다니면서 나와 의견이 다른 시민과 싸워 이기기 위해 일일이 쫓아다니며 설득하거나 싸울 수 없기 때문에 나 대신에 거기 가서 싸우라고 보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 대신해서 싸울 사람이 지금보다 많아야 더 좋을 것 같지 않은가? 챔피언 한 명을 16만 명 넘게 공유하면 조금 불안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보면 비례대표 의원수를 더 늘리는 게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지역적 이익과 기타 계급이나 이익단체, 소수자성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다양하게 반영하게 하기 위해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모두 늘려 뽑고 국회를 양원제로 운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단순히 싸우는 게 나쁘다는 생각에서 멈추면 양비론에 빠지기도 쉽다. 그리고 양비론은 염증을 일으켜 정치혐오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물론 익숙한 정치혐오를 벗어나면 시민의 권리를 외면하는 쉬운 길 대신에 시민의 권리를 쟁취해나가야 할 복잡한 길이 나온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사회에 대한 일이니까 조금 복잡해도 당사자로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고관여층이 될 필요까지는 없지만 지극히 내가 당사자라는 생각 정도는 시민윤리적으로 가지고 살자고 우리 모두에게 권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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