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통 내가 썅대남이라는 멸칭을 사용하는 집단에 대한 경향신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왜 썅대남은 2찍, 극우집회의 첨병이 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한 적이 있다.
왜 이 자들은 늘 순응하는가? 사실 이건 지난 번 최태섭의 '한국, 남자'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피지배계급 남성이 자립성/독립성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약간 썅대남이 그 결실인 셈이기도 한 것이다. 기존 사회질서가 이미 남성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적어도 나까지는 그걸 누리고 싶고 앞선 세대 남성들보다 못 누린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억울해지는 거다.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면서도 한남을 대입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어째서 저소득 백인들은 포퓰리즘 세력에 표를 주었나'를 다시 분석할 때,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서 능력과 기여를 저평가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수혜를 볼 차례를 기다렸으나 이것이 계속 유예된 것과 동시에 이 과정에서 자신보다 약자였던 집단(미국에선 주로 유색인종, 여성, 난민 등)에 내 순서를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겨 이것을 가능케 한 정치세력에도 분노하게 된다는 설명이 나온다.
사회안전망에 대한 반감, '심지어 사회적 안전망의 혜택을 받는데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도 시도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분배적 정의를 확대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생산자로서 공공선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회적 명망과 인정의 회복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기준으로 쓰인 책에서 자신들의 부족한 효능감을 약자를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채워온 한남의 식민지 남성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한국인이 가진 인고의 착각, 즉 '열심히 하면 리워드가 당연히 돌아오는 걸로 믿는 것'까지 더해져 구조는 같되 상황은 더 좋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썅대남은 단순히 요약하면 그저 '나는 열심히 했으니까 무조건 이전 세대가 보장 받았던 만큼은 보장 받아야 한다'고 믿는 내 차례를 새치기 당했다는 억울함이 가장 앞서는 듯 보인다. 나도 수혜를 받을 거라 믿었는데 군복무라는 거대한 피해의식 뻥튀기 이벤트의 존재가 있어서 유예가 되고 그 유예된 기간 동안에 여성들이, 다른 온갖 소수자들이 자기 수혜를 새치기해서 가져갔다고 손쉽게 탓을 하게 된 거다. 그래서 여성을 비롯해 소수자의 인권을 말하는 정치세력에게까지 반감을 갖는다.
자신의 효능감을 느낄 기회는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는데 과거(이를테면 100년 전)에 비해 여성 억압이 줄었으니 무조건 과거에 비해서 성차별이 없는데 예전처럼 여성에 대한 우대적인 정책이 계속되면 역차별이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현실의 여성이 어떤 여성혐오 속에 사는지, 세상이 얼마나 남성중심 사회인지 자신이 얼마나 혜택 속에 사는지,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 게 뭐가 있냐고 물으면 조작된 대안현실을 줄줄 읊기 일쑤다. 사실상 군복무를 강제하고 제대로된 보상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다 정치체계, 제도, 정부의 문제인데 탓은 여성들에게 하는 모습이다.
아마 지금까지의 대다수 한국의 기성정치세력은 썅대남이 저런 허튼 생각으로 2찍하지 않도록 구슬러야 한다 생각해왔고 아마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차별 속에서 사는 나 개인이 저 식민지 남성성을 체화한 차별주의자 썅대남들을 온정적으로 봐주어야 할까? 난 싫다. 그리고 다른 걸 차치해도 한국은 강간통념이 너무 창궐하고 여성 대상 폭력이 만연하다. 이걸 용인하고 굳이 온정적으로 봐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 있는 한국의 정치세력이 담당해야 할 몫이란 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명망을 회복하고 능력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여 효능감을 엉뚱한 방식으로 채우려는 세력에게 쓸데없는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의 포퓰리즘으로 표 한 장 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야 당장 가시권에 들어온 조기대선을 앞두고 광장의 민주적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만 할 텐데 부디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을 정치세력이 존재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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