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진은 물론 의정활동 보좌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지만 성질 상 기본적으로 '비서'이고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과 신경 써야 할 일은 너무 많은 데 비해 보좌진 숫자는 지극히 적다보니 보좌진이 공적인 업무 외에도 하는 일이 애석하게도 꽤 많다. 그래서 약간 내가 겪은 일과 거기서 일할 당시 들어본 기기괴괴한 보좌진의 다양한 업무를 가십성으로 좀 소비해볼까 한다.
※ 시작 전 주의사항!
이제부터 나오는 썰들은 마저리가 일하던 최소 10여 년 전의 이야기로 제22대 국회의 선진적인 국회의원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전혀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궁서체)
읍내 기록 갈무리 |
1) 식사 관련
의원과 보좌진은 정말 긴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하고 정치상황은 시시때때로 급변해서 밥때 맞추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으며 이번 내란사태에서 보듯이 낮과 밤도 따로 없이 집에도 못 가고 동고동락할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참 중요하게 될 때가 많은데 일단, 국회의 구내식당은 운영시간이 정해져 있다. 당연하다. 장소가 국회일 뿐 본질은 급식실이니까. 그럼 이제 방법이 몇 가지가 있다.
국회 안에 있는 후생시설에서 파는 간식을 사오는 방법, 배달시키는 방법, 의원실 안 탕비실에서 무언가 만드는 방법.
후생시설에는 카페도 있고 제과점, 떡집, 하나로마트, 분식매장 이런 것들이 있어서 끼니를 때울 만한 것들을 살 수 있고 이 정도로 커버가 되면 아주 준수한 경우이다.
다음은 배달. 배달은 다 좋은데 타이밍이 어렵다. 영감(보좌진이 의원을 지칭하는 은어인데 결코 영감에게 영감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보좌진끼리만 쓰는 말.)이 딱 방에 와서 먹을 수 있는 타이밍에 대령을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맞으면 진짜 이 담당 보좌진(주로 행정비서)이 발을 동동 구르고 난리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픽업은 막내가 주로 해오고 먹기 좋게 아름답게 세팅해서 대령하게 된다. 그나마 요샌 배달앱이 잘 돼있기나 하지, 옛날에는 영감이 뭐 먹고 싶다 하는데 배달이 안 된다 하면 가서 사와야 하는 거다. 그렇게까지 시키냐고? 그렇게까지 원하는 영감들이 꼭 존재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탕비실에서 무언가를 만들기. 눈치 챘겠지만 이 단계까지 오는 의원실이 정상적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 경험치 안에서는. 내 경우에는 국회에서 일하기 전에는 '지정생존자(김존자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에밀리 같은 일을 할 줄 알았는데 막상 했던 일은 식사 때 놓친 영감을 위해 사무실에서 전기포트로 라면 끓이기여서 초반에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들은 썰로는 꼭 출근해서 방(보통 의원실을 방이라고 많이 한다.) 식구들 다 같이 아침을 회관(보통 의원회관을 회관이라고 한다.)에서 먹어야 한다는 방이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그 방 행정비서는 아침을 차리는 게 굉장히 중요한 업무라는 것이다. 그니까 고상하게 표현하면 꼭 매일 아침 조찬회의를 해야 한다는 거다. 그것도 행정비서가 차린 걸로. 와 그때 들으면서 얼마나 욕을 했던가. 탕비실에 전기밥솥이 있다고 했던가. 정말 내가 국회에서 들은 기기괴괴 썰 중 탑급이었다. 심지어 뭐 복날 이런 때는 삼계탕도 끓인 적이 있다고.
먹는 거 관련한 썰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국회의원은 진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식사 때도 꼭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런 고로 식사 장소 예약이 엄청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여의도 주변의 식당들은 깡패 같은 의원실의 예약과 예약취소에 이력이 나있을 텐데 진짜 심할 때는 2~3분에 한 번씩 전화해서 예약시간이 바뀌고 인원이 바뀌고 단독 방을 내놔라, 아니다 홀도 괜찮다, 메뉴는 뭐로 해달라, 아니다 가서 정하겠다, 죄송하다 10분만 늦게 도착하겠다 등 정말 개진상을 떨곤 한다. 시간 약속에 철저한 가끔 발견되는 희귀한 영감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이제 일정 지연이 예사인 대다수 의원실은 본의 아니게 일정 담당 보좌진이 주로 저런 개진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식사 장소 고르는 것 자체도 영감 취향에도 맞아야지, 예전엔 그런 거 없었지만 이젠 김영란법에도 맞아야지, 돈 많이 없는 의원실이면 가격도 고려해야지, 만나는 사람 취향도 고려해야지 난리도 아니다. 특히나 '기자들'과 만날 때는 술을 나눠 마셔줄 보좌진이 동행하지 않으면 술 약한 영감이 리타이어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므로 그런 안배도 미리 해야 한다.
2) 수행 관련
솔직히 말해서 1장을 다 읽기조차 힘들어서 포기. 어떤 상황인지 거의 알 수 있었기에. |
책 '김지은입니다'의 1장에 나와 있는 수행비서의 많은 업무를 거의 모든 의원실의 수행비서가 다 한다.(사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직 책을 다 읽지 못 했다. 약간 PTSD 같은 괴로움이 치밀어올라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다.)
아닌 방도 물론 존재한다. 영감이 (오바마처럼) 가방이나 우산은 내가 든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면 됐어 됐어 손사레를 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사람도 사실 이것저것 보이지 않는 데까지 구석구석 보좌진이 신경써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가령 뭐 진짜 '김지은입니다'에 나오는 구두를 나갈 때 신기 좋도록 돌려놓는다든가 하는 것들. 그 정도는 약간 일이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본이었다. 내 경우에는 이제 수행 나가면 여름에 영감이 땀이 나니까 필요할 때만 걸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재킷이라든지 금뺏지 자주 잃어버리니까 사놓는 여분이라든지 다른 일정에서 해야 하는 축사를 투명 L홀더에 빳빳하게 껴서 가지고 다니다가 딱 손에 쥐어주는 것, 그리고 이제 나는 오바마 같은 영감을 만난 적이 없어서 가방도 들고 우산도 받쳐주고 그랬었다. 인턴하던 다른 친구들 일하던 걸 보면 항상 한 걸음 먼저 가서 영감이 앉는 방석을 깔아놓고 일어나면 방석을 챙겨 먼저 달려나가 구두를 돌려주고 딱 맞게 겉옷을 챙겨 바로 입혀주고 그랬었다.
운전하는 수행비서라면 늘 영감보다 늦게 먹기 시작해서 빨리 다 먹은 뒤에 차로 돌아가서 영감이 식당 출입구에 나가면 짠! 차를 대주기 이런 것들이다. 이게 뭐 특별한 일들이 아니고 보통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데 이제 문제는 이게 좀 잘 안 될 때도 있는 건데 가령 뭐 주차장이 헬이라서 제때 차가 안 빠진다든지 이런 경우. 이럴 때 영감이 씅내고 짜증내고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참 사람이 안 그럴 거 같은데 저렇게 남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챙겨주는 삶을 좀만 살면(약 1년 정도) 사람이 변한다. 나는 사실 뺏지병이라고 부르는 건데 자기 주변 모든 사람이 자기 위주로 자기만 챙겨주는 데 익숙해져서 사람이 미쳐버리는 증상을 보인다. 보통 초선 2년차가 가장 심하고 다시 좀 나아지는 것이 보통인데 영영 안 고쳐지는 영감들도 있다.
근데 영감들 사이에서도 운전하는 수행비서에 대해서는 좀 조심하려고 하는 그런 게 있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전화통화를 다 듣게 되는 게 운전비서라서다. 행여 영감이 뭔가 잘못해서 털린다 치면 운전비서가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영감의 개진상짓을 못 견딘 어떤 수행비서가 서강대교 한 중간에서 영감을 두고 차키를 뽑아 한강에 던지고 유유히 걸어나왔다는 유명한 회관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고 말이다.
3) 자녀/가족 관련
기기괴괴 썰 중에 엄청 다수를 차지한다. 임기 4년 내내 자녀 통학을 의원실 차로 시켜줬다는 유명한 썰은 뢰알로 존재한다. 내 친구네 방이었으니까 자알 안다. 내가 일했던 방에서도 영감의 초등학생 자녀를 이리저리 데려다주고 그랬던 적이 꽤 많았다. (다행히 애들은 착한 편이었지만) 가령 뭐 영감 아들내미가 초3인가였는데 큰집 제사에 참석을 해야 하는데 영감은 본회의인가가 있어서 못 가고 수행비서가 그 초3 꼬맹이를 영감 큰집에 모셔다 드린다든가 하는. 여튼 운전하시던 수행비서 분의 현타를 막기엔 무리였다. 그 외에 이제 내가 일했던 의원실에서 있었던 일은 영감 딸이 어떤... 그... 부잣집 대학생들만 참가하는 학술 클럽을 가장한 사교모임에 지원하는데 거기 제출한 자소설을 기자 출신이던 보좌관이 대필해준 일이었다. 당사자는 여행 중이었고 영감 사모가 회관에서 와서 보좌관이 쓰는 그 자소설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학술클럽과 관련해서 이제 나도 갈려들어가게 됐는데 무슨 주제에 대한 리포트를 쓴댔나 그랬는데 국회 도서관의 자료 조사를 싹 해서 논문을 찾아 두 쪽씩 모아찍기로 출력해서 인덱싱을 해줬다. 거기까진 그래도 내가 잘난 척할 수 있는 분야(한나 아렌트 관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책 읽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여서.)고 일하기 싫어서 잠깐 딴짓 느낌으로 해줄 수 있었는데 주요개념 설명부터 리포트 주제까지 잡아서 딸내미에게 브리핑까지 해줘야 하고 보니까 좀... 그때는 현타가 왔다.
그나마 난 양반이었다. 내 친구 중엔 영감 아들 토플PBT(10년 전쯤 어디 외국 가서 친댔던가) 오답 노트를 만들어주던 친구도 있었다. SKY 출신이었던 인턴 중에 영감 자녀 과외를 해준다던 방도 들어봤다.
가족 관련으로는 또 사모! 를 빼놓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한남이 절대적으로 많은 관계로 한남 의원실에는 사모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고의 사모는 전화로만 가끔 존재하는 사모이다. 집에서 챙겨줘야 하는 것들(대부분 가족만 처리할 수 있는 공문서 작업 등)만 잘 챙겨주고 인사는 진짜 최초 1회 상견례와 출판기념회, 영감이 도저히 너무 바빠 대신 참석해야 하는 지역 경조사 같은 때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모는... 내가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겪은 사모는 본인이 사무실에서 일할 것도 아닌데 사무실의 복사기 위치까지 정하는 사모, 임대인이라서 세입자 전세계약 연장해줘야 하는데 '잘 몰라서 보좌관님이 해주시면 안 되나요?' 묻는 사모, 화가라서 개인전 여는데 가서 오픈 세리머니 준비해주고 전시회 리셉션 자리 지켜줘야 하는 사모, 연말마다 달력 같은 굿즈를 굳이 만들어서 그 발송을 보좌진에게 시키던 사모여서 나는 참 사모 복이 없었다. 화가인 사모가 꽤 많아서 인턴들끼리 모였을 때 '야 니네 사모도 화가야?' 이런 설움을 공유하곤 했었다. 아 영감이 당뇨여서 도시락 들려 보내면서 잔소리하던 사모도 있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명절이 되면 영감 앞으로 온 선물을 받아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사모의 처분이 있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명절 하루이틀 전에 되면 사모가 친히 사무실로 납시어서 선물을 판별하시었는데 이건 좀 좋은 거, 귀한 거, 집에 필요한 거 등으로 분류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져갈 것은 나와 그 비슷한 아랫것들을 시켜 차에 실어놓게 한 뒤에 선심을 쓰기 시작한다. 몇 개를 전시해놓고는 골라서 가져가라는 것. 뭐 이미 남은 건 김 세트 같은 가장 저렴한 종류 또는 이미 여러 개 받아서 더 좋은 걸 챙긴 뒤인 것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나한테 뭐라도 떨어지니 나쁜 건 아니지 않겠냐, 생각이 들법도 하건만 꼭 그런 생각을 곱게 할 수 없도록 그러어어어어어엏게 생색을 내곤 했다. 분장실의 강 선생님에서 "나 같은 선배가 어딨냐~" 했던 것처럼.
4) 기타
영감이 특이취향인 경우들이 종종 있다. 사무실 안에 좋은 오디오를 놓아야 한다, 재실 중엔 자기 취향의 음악이 늘 흘러야 한다 뭐 이런 종류. 그럼 이제 그 비위를 잘 맞춰서 영감 사무실에 온다! 하면 그 음악을 미리 틀어놓고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뭐 어쩌다 같이 국회방송 같은 거 보는데 다큐멘터리에 흐르는 배경음악 제목이 뭔지 알아봐라, 그런 것도 한 적 있었다.
친구네 방에서는 정치자금 카드로 마트 장을 봐서 집에 갖다 둬 달라던 경우가 있었다. 이거는 뭐 기사로도 났어서 유명한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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