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본청 2층 안내도. 추억(?)의 당명들이 눈에 띈다. |
결국 편법 쪼개기 비정규직으로만 7년 넘게 쪽쪽 빨리던 불가촉천민 생활을 마감하고 나와서 '내가 남자였다면 좀 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에 다른 동갑내기 인턴들을 보면 인턴으로 몇 년 일하면 방에서 채용을 해주기도 했는데 남자들은 7급 단 애들도 있고 9급인 애들도 있고 했지만 여자 중엔 한 명 있었고 9급인 경우엔 정책비서가 아니라 소위 '행정비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너무 오래 불가촉천민 생활을 하고 있어서 창피하고 자격지심이 들어서 동갑모임에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버텼어도 아무 데서도 급을 못 달고 만년 불가촉천민인 게 너무 창피해서 나는 몇 명 되지도 않던 동문모임도 점점 못 나가게 됐다.
스물한 살 때 그 판에 흘러들어가서 제17, 18, 19대 국회, 지방선거 캠프와 총선 캠프를 뛰어본 경험이 있었고 오피스, 포토샵, 한글문서 작성 이런 것도 다 할 줄 알았고 법안도 혼자 만들었고 질의서도 썼고 수행도 해봤고 축사 쓰기, 사진 촬영, 블로그 컨텐츠 글쓰기, 의정보고서 제작 같은 잡무도 다 할 줄 알았고 학을 떼기 전까진 먼저 가라고 해도 악착같이 밤 새고 버티고 하다못해 커피도 잘 탔다. 내가 정책능력이 너무 모자란가 싶어서 의정연수원 강의도 제일 열심히 들었다. (그 때 배운 국가회계 기초는 그래서 지금 내 복식부기 가계부를 쓰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니 아주 쓸모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있던 방에서는 영감 지인이라서 회관에 들어온 아저씨들을 자질구레한 것을 다 알려줘가면서 일했지만 그래봤자 나는 인턴일 뿐. 내 덕분에 천하의 무식쟁인 친박밖에 모르는 바보가 우수입법의원 상을 타게 돼도 나는 인턴이었을 뿐이다.
아침부터 본청 수행하고 회관 가면 남자 바꿔보란 전화 받고 아가씨아가씨 하는 손님들 차 타주고 인턴이니까 법안 도장도 받으러 다니고 어린 여자라고 무시하는 기관사람들(주로 개저씨)한테 날 세우고 으르렁대고 그러다보면 퇴근시간이고 정신은 녹아 있고.
그래서인지 해고 당할 때도 사실 후련하기도 했던 게 저 모든 일을 다 해본 결과, '해볼 만큼은 해봤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끝에 나는 나를 위해서 '어른이란 정말 간절히 바라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지역에서 돈 좀 만지는 손님이 사무실에 왔었는데 접객하다보면 눈치가 빤하니 커피를 그 손님한테 제일 먼저 줬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서 십만 원짜리 수표를 바로 지갑에서 꺼내준 적이 있었다.
새마을금고 십만 원짜리 수표. 잊을 수도 없다.
이 글을 읽으며 '성별은 상관없었을 거예요'라고 혹은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닐 거예요'라고 말할 수 없어 너무 마음이 아파요. 긴 시간 고생하셨어요. 🥲
답글삭제고맙습니다. 그래도 간간이 있었던 뿌듯한 순간들 덕분에 그 시간들을 온통 저주하지는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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