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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원한

제19대 국회에서 불가촉천민이었을 때 낸 개정안이 있었다.


형법 일부개정법률안.

어떤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던데 '개헌보다 어려운 게 형법 개정이다.'라고.

동의한다. 나는 이 법이 법사위에서 받은 취급을 보고 기대도 안 했지만 그보다도 더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법제관님의 도움을 받아서 쓴 제안이유 및 주요내용은 이렇다.


우리 판례는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폭행·협박의 정도에 대해 강제추행죄와는 다르게 최협의 기준인 “항거불능 또는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상태”로 해석함으로써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피해자의 성적자기결정권과 배치됨. 그뿐만 아니라 강간죄의 피해자를 ‘범죄의 원인제공자’ 또는 ‘반항조차 충분히 하지 않은 방조자’로 보아 재판을 ‘피해자재판’으로 변질시킴. 피해자의 반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면 강간죄가 성립하는 미국과 독일, 프랑스의 사례나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실행된 성행위에는 모두 성범죄로 규정하는 영국의 사례에 비추어보아도 우리의 강간죄 성립요건에 항거불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임. 이에 현행법상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폭행·협박의 정도에 관해 강제추행죄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재판부의 최협의 폭행·협박 기준 적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입법적으로 해소하려는 것임(안 제297조, 제297조의2 및 제298조).


피해자 재판으로 변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면 재판 과정에서 2차 가해가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피해자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가해자 측 변호사는 물론이고 검사나 판사조차도 그러는 경우가 있다. 


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고 겨우겨우, 정말 겨우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한 피해자가 있었다. 근데 그 피해자에게 검사(그것도 검사가 중간에 바뀌어 반복 진술을 해야 했고)가 '메시지 보니까 아빠랑 사귄 거 맞네' 같은 말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 피해자를 돕던 시민단체 관계자가 자신에게 와 엉엉 울던 피해자를 두고 아니 가해자측도 아니고 어떻게 검사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취재기자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던 기사가 있었다. 성폭력범죄 피해자는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숱한 2차 가해를 겪어내야 한다. 물론 좋은 검사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검찰측이 아니라도 가해자측의 2차 가해는 집요하게 이루어진다.

사생활이 문란하다, 가해자 말고도 타인과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강간을 일으킬 만한 빌미를 줬다,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다, 그렇게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다 온갖 과거지사가 다 증거로 제시된다. 해당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성적 지향이나 취향, 성생활, 과거에 대한 증거는 재판에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강간사건은 '화간이었다'고 주장하는 가해자측의 피해자 재판으로 쉽게 흘러간다.


성폭행 후 지적장애인에게 떡볶이 사줬다고 화간이었다, 는 판례에 분노했던 기억을 가진 분들이 계실 것이다. 사후에 금품을 주었든, 주어서 받았든 강제로,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사건을 한국 사법부는 기나긴 세월 동안 성범죄가 아닌 걸로 판결해왔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정말정말정말 최협의로만 인정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사건들에서도 직장 내 위계문제라든지 인사권한 등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항거불능이었느냐, 결사적으로 저항했는가 이런 걸 따지는 피해자 재판을 한다는 것. 심지어 피해자의 직업이 성노동자라면, ‘성매매를 하는 업소에서 금품을 주고 화간을 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해서 피해자의 사생활을 불필요하게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법정에서 피해자의 직업과 행실을 꼬투리 잡아 강간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하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가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하든 술을 많이 먹어 인사불성이었든 아니었든 평소에 어떤 성생활을 영위했든지 간에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 당했다면 그것은 강간이지만 한국 사법부는 그걸 인정을 안 한다. 법에 한 글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법부는 보호할 만한 정조만 보호한다, 는 수준에서 벗어난 것이 없어 보인다.

사법부에서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은 사법부에 이런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재판 양상을 막을 규율이 없을까? 있다. 대법원규칙에는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을 증거로 삼아선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국회가 입법을 통해 사법부에 제동을 걸어야 하고 명백히 법률에서 먼저 성적 자기결정권을 성범죄 관련 법의 보호법익으로 설정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발의한 법이었다! 강간죄는 항거불능이 요건이 아니고 항거곤란으로 족하다!


항거불능과 항거곤란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항거불능 :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때문에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출처) - 최협의 폭행/협박

항거곤란 : 법률 제10258호로 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이후 몇 차례 개정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범죄를 유형화하고 처벌을 강화하였는데, 특히 2012. 12. 18. 법률 제11556호로 전부 개정되면서 제6조 제4항의 장애인에 대한 준강간·준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에 ‘항거불능’ 이외에 ‘항거곤란’도 추가하여 구성요건을 완화하였다. 특히, 2023년 9월 21일 선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보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 요구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으로 재해석하여 판시(출처)


그런데 이 글의 제목이 왜 원한인 이유는 이 내 법안이 법사위에서 받은 취급때문이다. (나는 옹졸한 사람이다.)


1)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의 검토의견



2) 법무부 차관의 법안소위 발언



3) 법원행정처 차장 법안소위 발언(이름이 익숙해 보인다면 그 사람 맞다.)



4) 당시 순장조 김*태 위원 법안소위 발언



그래도 세상은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이다.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던 민문기 전 대법원 판사(당시엔 대법관이 아니었음)의 소수의견 맺음처럼 이 법안에 대해 찬성 발언을 해주신 분들이 존재한다.


1) 당시 정의당 서기호 위원 법안소위 발언(판사셨어서 그런지 개정안의 요지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계신다. 심지어 더 완화하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까지.)


2) 당시 민주당 서영교 위원 법안소위 발언



이 개정안이 법안소위에서 의미 있게 논의된 것은 여기까지이다. 그나마도 내가 접수했던 건 2013년, 내가 해고 당한 건 2014년, 저 법안소위는 2015년이었다. 이후론 그냥 임기만료폐기 수순. 그런 망한 법안의 이야기다. 그래서 내게 어떤 지극히 공적이고도 사적인 원한이 있다, 그런 이야기다. 


보좌진이었던 마저리는 죽었지만 그래도 오늘날 산 보좌진을 도울 수 있진 않을까? 

누군가 이 개정안을 같은 내용으로 또 접수해달라고 제20, 21, 22대에 모두 바랐는데 아직이다. 그래서 오늘도 또 바란다. 누군가 또 이걸 발의해주길. 개헌보다 어렵다는 형법 개정을 추진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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