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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처벌법 제29조 제1항은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 a.k.a. 성특법) 제29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일단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제29조(수사 및 재판절차에서의 배려) ① 수사기관과 법원 및 소송관계인은 성폭력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나이, 심리 상태 또는 후유장애의 유무 등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조사 및 심리ㆍ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격이나 명예가 손상되거나 사적인 비밀이 침해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최말자 선생님은 한국의 형법학 교과서에도 실리는 대표적인 '정당방위' 사례로 유명하시지만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이 있다. 검사의 수사 과정, 기소, 재판 과정에서 그림 같은 2차 가해를 당하신 것이다. 언론에 기사화가 많이 되어 유명해진, 검사가 수사할 때 다짜고짜 했다는 말이 기가 막히다. “못된 년, 네가 계획적으로 그랬지?”


56년만의 미투 최말자 선생님의 1인시위(ⓒ연합뉴스)


수사 때뿐만이 아니라 재판과정에서도 검사에 의한 2차 가해는 이어졌다. 당시 '부산일보' 기사(1964년 10월 22일자)에 따르면 2차 공판 때 검사가 ‘으슥한 벌판까지 혼자 따라간 이유는?’ ‘키스가 뭔지 아느냐?’ ‘키스할 때 혀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나?’ ‘처음부터 노씨에게 호감이 있었던 거 아니냐?’ ‘노씨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 등을 물었다. 

1964년의 저런 2차 가해는 멈출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변태하여 21세기에 와서 더욱 끔찍한 사례가 되었다.


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고 겨우겨우, 정말 겨우 용기를 내어 신고를 한 피해자가 있었다. 근데 그 피해자에게 검사(그것도 검사가 중간에 바뀌어 반복 진술을 해야 했고)가 '메시지 보니까 아빠랑 사귄 거 맞네' 같은 말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 피해자를 돕던 시민단체 관계자가 자신에게 와 엉엉 울던 피해자를 두고 아니 가해자측도 아니고 어떻게 검사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취재기자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던 기사가 있었다.

몇 년 전 요양병원에서 다리가 불편했던 60대 여성이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강간 당하고 재판 진행 중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살했다. 그 유서에 담긴 절망의 느낌이란. 과거 성매매 종사자였던 여성이 강간 당한 사건에서도 가해자측 변호사는 물론 검찰측에서도 피해자를 의심하는 것을 못 견디다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 성폭행 후 지적장애인에게 떡볶이 사줬다고 화간이었다고 한 판례는 엄청난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지 못해 친절하게 보낸 카톡 몇 개만으로도 화간을 주장하는 재판을 여럿 보았다.

성폭력범죄 피해자는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숱한 2차 가해를 겪어내야 한다. 물론 좋은 검사님들도 많이 계실 것이다. 검찰측이 아니라도 가해자측의 2차 가해는 집요하게 이루어진다. 사생활이 문란하다, 가해자 말고도 타인과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강간을 일으킬 만한 빌미를 줬다,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다, 그렇게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다 온갖 과거지사가 다 증거로 제시된다. 해당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성적 지향이나 취향, 성생활, 과거에 대한 증거는 재판에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강간사건은 '화간이었다'고 주장하는 가해자측의 피해자재판으로 쉽게 흘러간다.

미국의 '연방증거규칙'(Federal Rules of Evidence, 소위 'Rape Shield Law')을 보면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이나 행실에 대한 사항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수많은 성폭력범죄의 재판에서 피해자의 행실을 구실로 삼는 피해자 재판이 너무나 흔히 자행된다. 법정에서의 이러한 2차가해까지 받아야 했던 피해자의 사례는 생각보다 너무나 많았다.


한국의 강제추행, 강간 사건의 판례에 자주 나오는 문장이 있다.

"피해자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대체 왜 이걸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가? 피해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기반하여 그 성적 접촉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주장하기에 충분해야 하지 않은가? 더구나 최말자 선생님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건 가해자측 변호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검사도, 판사도 2차가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대체 피해자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 설령 재판에서 이겨서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미 받은 그 정신적인 고통은 누가 보상하지?

한국의 사법부에도 이러한 관련 규정이 아주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규칙인 형사소송규칙 제74조에 보면 증인에 대한 위협적이고 모욕적인 신문 등을 할 수 없도록 하여 증인신문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건 대법원 규칙이고 실제 재판을 보면 준수되고 있다고 볼 수가 없다. 특히 저 맨처음에 본 성특법 제29조는 지키지 않아도 처벌되는 법이 아니다. 

따라서 성특법을 개정하여 피해자의 과거 성적 경험이나 취향, 품행 등에 대한 신문의 금지 및 그에 관한 내용의 증거능력 제한을 명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재판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것은 2017년 당시 문재인 대선후보 공약에도 '들어가 있었지만 실현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짤리기 전 의원실에서 일할 때 법안으로 냈었다가 2016년에 임기만료폐기 되어서 우울했는데 공약에 들어가 있어서 잠시 가슴이 웅장해졌지만 결국 Rape shield law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22대 국회에 누군가 성폭력처벌법 제29조 제1항의 실효성을 담보해줄 개정안을 내주기를 나는 아직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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