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심리 수업 중 자살에 대해 배우면서 '무망감(hopelessness)'가 굉장히 강력하다고 배웠다. 내가 매일 열심히 살아도 그날 그날의 행복도, 나중의 행복도 기대할 수 없는 희망 없음의 상태. 그게 국가단위인 게 현재 한국 같다. 특히 젊은 세대는 인구재생산보다 약간 커트 코베인 정신('서서히 사라지기보다 한 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It is better to burn out than fade away.)') 으로 사는 중인 듯하다. 어차피 나중이 된다 해도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을 기대하긴 힘드므로.
예를 들면 이런 거다. SNS계의 타이타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구트현엑이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가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거기에서 블루를 결제하면 좀 나을까 싶어 시도를 하고 새 계정을 파면 트좍들이 보일까 싶어 새 계정도 파보고 하는데 지금 한국사람들은 소멸에 대항할 그 어떤 실질적인 발버둥도 하지 않는 듯하다.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다가올 파국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표현하는 쪽이 차라리 더 어울릴 것이다.
내가 몹시 자주 반복하는 문장인데 나는 한국의 장노년층이 진심으로 이 인구감소를 걱정하고 저출생을 염려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신호가 두드러진 건 IMF 때 청소년이던 지금의 그 빌어먹을 두루뭉실 MZ 중 M을 맡고 있는 세대가 사회로 나올 즈음부터였는데 그때부터 정말 기성세대는 진정으로 소용 있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출생률이 낮은 것과 자살률이 높은 건 얼핏 동떨어진 지표 같지만 나는 두 지표의 원인이 모두 무망감이라고 보고 그 점에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지 못해 사는데 무슨 번식을 하겠는가 말이다.
국가통계포털의 통계를 좀 가져와봤다.(참고 링크)
첫 번째 통계는 대조군이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의 청소년, 청년 연령대 자살률(단위 명)이다. 벌써 30년쯤 전의 통계이다.
두 번째는 IMF 시기 위와 같은 연령집단의 자살률이다. 위에서부터 10-14세, 15-19세, 20-24세, 25-29세 구간이다. 1998년에 꽤 튀는 것을 볼 수 있다. 1997-1998년에 15-19세였던 집단을 기억해두고 넘어가자.
세 번째는 그 약 10년 뒤의 통계이다.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10-14세, 15-19세, 20-24세, 25-29세 구간이며 바로 위 두 번째 표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연령대 집단의 10년 뒤 시점에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급등한 자살률을 볼 수 있다. IMF 때 15-19세였던 청소년이 10년이 흘러 본격적으로 사회로 나올 25-29세 연령대가 된 것인데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다. 여기설 표가 잘렸지만 2011년 30.1%를 찍기까지 자살률은 상승일로였다가 2012년부터 안정세로 넘어온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초록색으로 표시된 15-19세 연령집단을 기억해두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마지막 표는 또 10년 뒤이다. 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한 집단의 자살률이 또 어마어마하게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2017-2019년에도 이미 높았는데 2020년 코시국이 되니 더 폭발적으로 늘었다.
또한 색으로 표시하지 않았지만 10대 초반 청소년이 남긴 코시국 동안의 자살률도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 사태가 관측된 건 20년이 넘었는데도 사실상 자살률을 낮출 방법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고민이 없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사람들이 자살을 마음먹지 않게끔 하는 소용 있는 일을 한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강 다리에 펜스 높이를 높이고 상담전화를 설치한 것 정도?
얼마 전에 최재천 교수님 유튭을 보니 자꾸 인구를 늘리자고 하지 말고 적어지는 인구로도 잘 살 방법을 모색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었다. 억지로 새로 더 태어나게는 안 하더라도, 그래도 이미 태어나서 살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목숨을 버리게끔 희망 없음 앞에 무력한 사회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요즈음 내란 이후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거리로 몰려나온 젊은 여성들이 희망이라는 찬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특히 이 집단의 자살률과 자살시도율은 지난 5년 동안 모든 성별과 연령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참고 기사) 이 집단이 정말 이렇게는 살 수가 없어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든데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서 절박함에 먼저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성경에 보면 야훼가 예언자의 입을 빌려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자신의 영을 부어 주겠다면서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vision)을 보고 늙인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뒤에 심판이 있더라도 어쨌든 다음 세대가 될 자녀들, 젊은이들은 앞날을, 희망적인 것을 약속한다는 거다. 항상 이 구절이 뜬 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이 포스팅을 쓰다가 젊은 세대가 인생을 살면서 시련을 만나더라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건 희망이라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기성세대로 분류될 나이가 되다 보니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나, 를 자꾸 반추하게 된다. 그치만 이럴 시간 뭐라도 하나 더 해야만 하겠지. 그래서 결국은 좀 늦었더라도 투쟁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정말 많이 듣고 많이 외치는 말인데 그래도 그 힘과 가치가 깎이지는 않는 것 같다. 투쟁! 💪💪💪💪
아이를 키우면서 부쩍 느끼는데 요즘 세상은 정말 아무도 진짜 '아이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 보여요. 혹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로 아이가 행복하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싶고. 그래서 삶에 대한 애착도 낮겠지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
답글삭제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면 내가 언제 행복한지도 알아야 하고 행복의 감각이 어떤 건지도 풍부하게 알아야 할 텐데 뭔가 최근의 한국은 그 모든 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려는 것 같아요. 돈이 진짜 너무 없으면 당연히 행복할 수 없는 건 맞지만 저는 사회안전망이 너무 없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뒤에 사람들이 미끄러지면 끝장이라는 공포감이 트라우마가 되어 이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삶에서 좋은 것들을 쉬이 많이 찾을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애착을 더 가질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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