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일할 때 항상 법제 업무를 하면 답답함이 좀 있었다. 물론 법이라는 게 사람들의 기본적인 상식 선에서 이해되는 게 80% 정도는 되지만 법제 실무를 하려면 법 체계 자체에 대한 이해나 법적 사고방식이 필요하긴 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법제 실무를 수행하면서 그 부분에 있어 부족했던 점은 법제실의 담당자 분이나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 분들이 채워주셨다. 거의 과외 수준으로 떠먹여주실 때도 있었고 진짜 수업 듣는 학생처럼 받아 적고 이해하고 맞게 이해했는지 되짚어보고 다음에 또 법제 할 때는 조금 수업을 덜 들어도 되는 이해 상태로 만들어보자 생각하고 그런 반복이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국회 직원은 방송대 등록금이 지원되었지만 솔직히 보좌진이 방송대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리고 또 나름 학교를 다니는 건데 등록만 해놓고 대충 공부하는 것도 성질에 맞지 않아서 시도하지 않았다.(그리고 솔직히 그때는 인턴도 그 등록금 지원해주는 건지 확실치 않아서 시도 안 한 것도 있었다. 세전 120 시절이라 방송대 등록금도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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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회를 나오고 10년이 흘러서 사이버대학교의 법학과에 학사편입하기로 한 건 마치 고3 때 갑자기 정치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그냥 '해볼까? 재미있을 것 같아' 정도의 결심이었다. 이걸 어디 써먹을 건 아니고 그냥 나의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
그리고 실제로 즐겁기도 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지식과 이해가 생겼을 때 저 옛날 국회에서 과외처럼 듣던 내용이 그제서야 진정으로 이해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랬다면 어떤 법제 실무는 조금 더 용이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순간이 있긴 있었다. 지금 배우는 이 법에 대한 지식이 그때 있었다면 좀 더 세련되게 법제 실무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종류의.
하지만 실제로 다시 학부생이 되어서 기초적인 법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한 건 그런 한갓진 생각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법학 공부 방법이라는 걸 알고 나니까 '갓 스무 살이 된 초보성인에게 이렇게 법을 가르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였다. 법학을 공부하는 초보에게는 우선 법의 기본 정신과 법칙을 가르치고 그 위에 법 조문의 뜻, 해석론, 그리고 판례를 이어서 해설한다. 판례의 경향을 가르치면서 결국 학습자인 나에게 돌아오는 결론은 이거다.
'판례는 이렇게 해석하니까 시험에는 이것이 답이다.'
사회과학을 기본 세팅으로 하고 있는 나는 형법이나 공법 계열 수업을 들을 때마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이게 법 규정이 왜 이래? 왜 못 바꿔? 입법 시도 없나? 이걸 왜 그냥 이대로 참고 살아야 해?'
이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의안정보시스템에 들어가서 개정법률안 접수된 게 있나 찾아본 적도 있었다. 정치학은 권력의 흐름과 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국가 체계와 정책도 역학에 따라, 사회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국회의 입법이란 그런 변화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행위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게 당연한 사고방식으로 구성돼 있는데 법학 공부가 저런 식이니 정말 '이게 맞아?'만 한 수업에 오천만 번 반복하게 되는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던 거다. 그러다 이제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이미 사람이 이렇게 형성된 다음에 이걸 배우니까 이게 어색한 건데 처음부터 이렇게 배운 사람은 이 답답함을 많이 느낄까?
성인의 세계에 막 발을 내딛기 시작해서 더 넓어진 사회를 접하며 가치관을 한창 열심히 정립해 나갈 20대 초반의 젊은 성인들에게 저런 식으로 법학을 주입하는 것이 정말 수험 이외에 학문적으로든 뭐로든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걸 무분별하게 그런 것을 외우고 받아들이다보면 자기 생각이 어떤지는 뒷전이고 기계적으로 '아, 이거 판례는 이렇다고 했어'만 출력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약간 뒷골이 띠잉 해졌다. 그와 함께 저 옛날 사법시험 출신의 엘리트들이 지금 왜 그런 납득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힌트를 좀 얻은 것 같기도 했다. 판례 밖에 난 길로 나가는 방법을 모르거나 알아서 그 길로 나아갈 용감함이라곤 없는 사람들. 돌이키기에는 이미 평생을 너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라고 달랐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내가 만약 학부 시즌1에 법학을 전공했다면 지금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법학 공부하면서 많이 했다. 지금 아는 법학 지식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뭐 약간은 좋았겠지만 난 훨씬 입법적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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