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내가 집에 갖고 있는 건 개정판(2005년)이고 사실 개정2판(2010년)이 있긴 하다. 개정2판은 서점 어디서든 구입 가능. 하지만 이북은 없다, 애석하게도.
약 20년 전 학부 시즌1 때 읽었었는데 저 사진 속 보라색 인덱스가 그때의 흔적이다. 그때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는데 글쎄 요며칠 읽으니 더 사무치고 마는 것이다. 요즘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조금이라도 한국사회와 한국의 정치,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도록 돕는 안경을 제공해주는 책이랄까, 그렇다.초판(2002년)의 머리말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인데 이 부분만 살짝 옮겨보려고 한다. 사실 여기까지만 읽어도 기본 이해의 틀을 잡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계급간 불평등 구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심화되어 왔으며, 과거 교육과 근면을 통해 가능 했던 사회이동의 기회는 크게 줄어들었다. 어느덧 서울의 강남을 중심으로 상층 계급문화가 발전하고 소득과 교육의 기회가 점차 정비례하는 현실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그 결과 권위주의와 급진주의 양자에 모두 비판적이면서 그간 온건한 방향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던 중산층 중심의 세계관이 급격히 약화되어, 중산층 상층의 특권화된 사회부분과 나머지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부분 간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정치는 매우 보수적인 이념적 범위 안에서 기존의 정치행태를 지속함으로써 사회적 기대와는 거리가 먼 정치계급(political class)¹의 쟁투장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한국정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냉소를 넘어 거의 분노에 가까운 상황이다. 엄청난 사회적 불만이 팽만해 있지만 정상적인 제도와 절차를 통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또한 없기에, 뭔가 강렬한 변화를 바라는 사회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대상황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요구에 기초하여 대안을 조직하는 정치 본래의 기능이 발휘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이 속에서 한국사회가 좀더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사회적으로 건강한 뿌리를 내릴 수는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한국민주주의는 사회적 요구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무력해지고 있는가? 왜 제도권 정치 세력은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채 보수적 경쟁에 머물고 있는가? 이 책을 통해 내가 대면하고자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오늘의 한국현실만큼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 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하는 것도 없다. 잘 알다시피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다. 그러한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그야말로 '범국민적' 이라 부를 만큼 감동적인 대규모 시민참여의 민주화운동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권위주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민주주의를 사회적으로 안착시키고 내용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그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민주주의는 더는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을 만들어 내는 단어가 아니다. 일반 국민은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조차 한국민주주의의 현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비판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를 통해 기대했던 것과 한국민주주의가 실제로 가져온 결과 사이의 격차가 만들어 낸 실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같은 실망이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을 동반하면서 한국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어렵다. 실망이 실망에서 끝나거나 환멸이 환멸로 끝난다면 한국민주주의는 물론 한국사회의 미래는 없다.
민주화 이전에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좁은 관점으로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겠다. 그간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최소정의적 관점, 즉 보통선거권, 주기적인 선거, 정당간의 경쟁을 통한 정부의 구성 등 민주적 경쟁의 규칙을 확립하는 '절차적 최소요건'을 갖춘 정치체제로 이해해 왔다. 물론 민주주의는 최소정의를 통해 접근할 때만이 비교의 시각과 더불어 사회과학으로서의 분석적 엄격함과 정치함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의 문제를 갖는다. 그것은 방법론적 엄격함을 추구한 나머지 지나치게 미시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또 매우 기술적으로 편향된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어쨌든 민주주의에 관한 최소정의적 접근은 민주주의를 향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토크빌(A. de Tockqueville)²이 보았던 것처럼 정치의 체제이기보다 '사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최소요건을 갖춤으로써 스스로 자기 발전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떤 지적·도덕적·문화적 토양을 발전시키는가에 따라 더 좋은 내용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똑같지 않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다르고 유럽의 민주주의가 다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천하고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한국민주주의의 미래는 열려 있다.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수준과 같이 간다. 민주주의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고 질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은 그래서 중요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도 커지고 민주주의를 더 이해하게 됨에 따라 사회적 실천도 늘어나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어떤 현실에 기초를 두고 또 어떤 이론의 안내를 받으면서 사태를 전망하는가를 반추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하나 이해를 넓히고 이를 통해 시민적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적 논의와 논쟁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좋은 논의와 논쟁은 사태를 명료하게 만들고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더 넓고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참여와 실천을 자극하는 민주주의의 기관차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가 지식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지식인의 역할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 자리를 주류 언론의 지배적 담론과 기득 이익을 위한 수구적 논리가 대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주류 언론이 만들고 주도하는 이슈와 의제의 틀 안에 동원된 필자일 뿐이다. 그 결과 언론은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지식사회와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담론의 생산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나 이성적 논쟁이 숨쉴 공간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생산하는 담론이란 정치를 공격하고 정치를 부정하는 것, 혹은 냉전반공주의와 오랜 권위주의가 강요한 좁은 이념적 시야에서 지극히 협소한 정치의 언어만을 조합해 내는 데 그친다. 우리는 매일 모든 언론의 정치관련 기사가 얼마나 천편일률적인가를 목격한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대안적 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비판은 의도했든 안 했든 민주주의를 말할 공간을 축소시켜 버린다. 언어가 제약된 곳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갖기는 어렵다.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성적인 비판과 논쟁의 장이 개척되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이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서이자 동시에 한국민주주의를 둘러싼 지배적 담론과 해석에 대한 비판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지난 50여 년의 현대 한국정치를 소재로 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구조, 변화를 다룬다. 오늘날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해석의 차원을 넘어 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초기 형성조건과 제약, 그리고 이후의 사태 전개와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정치사의 시계열적 서술이나, 다소 형식주의적인 구성을 갖는 한국정치 관련 교과서와는 달리 이 책은 문제 중심의 접근과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을 통해 나는 오늘의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중심 문제를 포착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기원과 구조를 밝히고 나아가—비록 정교한 프로그램과는 거리가 있겠지만—일정한 방향의 대안을 모색해 보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정치에 대한 정밀화가 아니라 소묘이며, 핵심구조와 역동성에 초점을 두고 여타의 요소들을 과감히 생략하는 토르소(torso)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크게 보아 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정의하는 첫 번째 부분에서는 오늘의 한국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책 안락한 보수주의에 젖어 있는 시대상황을 비판한다. 두 번째 부분은 한국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변화에 비해 보수화되고 정치계급의 일상사로 고착된 현실의 역사적·구조적 기원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세 번째 부분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문제, 즉 지난 15년간의 경험을 다룬다. '왜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는 무능한가', '시장으로의 전환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민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탐색할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이 책의 결론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나는 여기서 현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안은 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킬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가 문제라고 정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답게 만드는 것만이 대안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다. 나는 한국정치에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반(反)정치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정치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정치를 없애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난 2, 3년 사이 내가 그동안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당관련 분야와 정치철학 분야의 문헌들을 읽게 했던 동인이 된었다. 이 시기 나는 립셋(S. M. Lipset),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사르토리(G. Sartori)와 같이 지금은 고전이 된 정당에 관한 이론들과, 로크(J. Locke), 매디슨(J. Madison), 토크빌의 자유주의, 그리고 마키아벨리(N. Machiavelli)로 대변되는 공화주의(republicanism) 전통의 이론들을 읽게 되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실천과 수준은 대체로 정치경쟁의 장에서 국가와 사회 사이를 매개하는 대표체제인 정당(체제)의 발전수준과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정치철학의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민주주의의 주요제도들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규범과 가치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효율성을 가지며 작동할 수 있는가 하는 이른바 제도의 문제는 대부분 정치철학적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나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당면하게 된 숱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 때늦은 감이 있지만 고전의 중요성을 깨달은 셈이다.
이 책은, 내가 소장으로 있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주관하여 지난 2002년 8월 12일부터 21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진행했던 "민주주의 특강"의 산물이다. 처음 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 정치교육이 절박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강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의 언어를 확장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특강에 임했다. 한국민주주의를 주제로 하는 강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까 하는 회의적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강생들의 관심은 뜻밖에 컸다. 강좌의 신청 과정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신청쇄도가 있었고 애초 강의실보다 규모가 세 배나 큰 대형강당으로 장소를 변경하면서까지 수요에 대응하려 했으나 강의 개시 1주일을 앞두고 신청을 더 받을 수 없게 되기에 이르렀다. 특강을 시작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특강이 끝나고 나서도 내 강의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여 주었다. 확실이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만큼이나 변화에 대한 욕구도 크다는 것, 한국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민주주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열정도 많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젊은 세대가 정치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이번 강좌를 통해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젊은 세대의 신세대 의식, 개인주의적 사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우리 사회 공동체의 문제에 열정을 가질 수 있는 통로와 대안이 배제된 정치가 문제일 뿐이다.
특강이 끝난 후 많은 사람으로부터 책을 내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번 특강을 통해 확인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열망에 무언가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강의에서 했던 내용, 혹은 준비했지만 강의에서는 사용하지 못한 내용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 책을 쓰면서 내 의식의 한 켠에서 반복적으로 연상된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강의 시작 얼마 전에 보았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이었다. 뮤지컬 초반부에서 민중들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네" 라고 노래한다. 원작 『레미제라블』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 이후에 민중의 실망, 민중혁명 이후에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화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적인 질문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한국민주주의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제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민주주의와 마주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¹정치계급 | 이탈리아 정치사회학자 모스카(G. Mosca)의 개념, 대의민주주의하에서도 당원과 지지자의 이익 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통치하는 소수 정치 엘리트가 존재한다는 것 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²토크빌 |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 1835년에 제1권, 1940년에 제2권이 출간되 Democracy in America를 통해 시민의 삶 속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가를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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