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民族. 국어사전의 정의와 학술적 정의가 퍽 다른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국가 단위인 국민과 굳이 저렇게 분류를 하다니. 그러다보니 일반적으로 '민족국가'로 번역해야 할 nation state를 번역기들이 '국민국가'로 번역하곤 한다. 심지어 구글에서 한국어로 '민족'을 검색하면 위키피디아의 ethnic group이 상단에 뜬다.
|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 |
그러면서 nation의 번역어로서의 민족이라는 부분이 따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위키피디아에서 영어로 nation을 따로 검색하고 한국어 문서로 넘어가면 뭐가 나오느냐?
'국민'이 나온다.
|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 |
'국민'이라는 용어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고 한다. 물론 고전 한문(좌전이나 주례 같은 책)에 국민이라는 말이 안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같은 쓰임의 국민이라는 말은 저 위의 위키피디아 캡처에도 있듯이 후쿠자와 유키치 때문에 남은 것이다. 한국어를 국어, 한국역사를 국사라고 해서 배우는 것도 저 흔적이라고 학교 다닐 때 '국사'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굳이 나라 국(國)을 끌고 온 건 역시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뉘앙스를 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걸 참 좋아했던 게 20세기의 한국 군사독재 세력이었다. 심지어 우리 큰언니는 학교 다닐 때 도덕 과목 이름이 '국민윤리'였다.
어차피 원래 한국(그리고 일본)에 있던 개념이 아니고 구미에서 수입한 개념인데 그 자들은 어떻게 정의하는지 한 번 볼까?
| 출처 : https://www.britannica.com/topic/nation-state |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민족을 설명하는데 첫 문장을 옮겨보면 이렇다.
민족국가란 자신을 한 민족으로 정체화하는 시민 공동체에 이름으로 지배되는 국가(영토로써 구분되는 자주적인 정치 체계)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민족이라는 집단은 자기들을 한 민족이라고 스스로 정의내리는 시민들의 집단인 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했을 때 '그 권력이 나한테서 나오는 권력이지'라는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이 바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늭낌적 늭낌으로 한국의 대중은 '민족'이라고 할 때는 나와 같은 나라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공유하는 정체성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나랑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피부가 비교적 하얀 편이며 체취가 별로 안 나고 마늘을 좋아하고 쇠젓가락으로 불닭볶음면으로 맵부심을 부릴 수 있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집단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 분류대로라면 북한 사람들은 '우리 민족(ethnic group)끼리'가 가능하다. 다만 북한 사람들은 한국 국민이 아닌 거지.
하지만 학술적 의미로 따진다면 대한민국 시민권을 가지고 스스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주권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이 우리 '민족(nation)'이 된다. 그렇게 치면 대체로 21세기의 대한민국 시민권자들에게 북하는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될 수 없다. 그런 차이다.
이러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일민족국가'라는 표현은 경우에 따라 인종차별 표현이 되기도 하고 저 nation-state라는 말을 좀 더 명확하게 나타낸 말이 되기도 한다. 이상적인 민족국가의 형태는 사실 한 국가의 경계 안에 한 민족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 그거 한국이잖아? 맞다. 근데 이런 경우가 현실에 드물다. 그 드문 경우가 한국인 것이다.
multinational state가 훨씬 흔하다. 가령, 내가 테니스 선수 앤디 머뤼고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스스로 스코틀랜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치자(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일단 가정이다.). 하지만 2013년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나서 듣는 말은 '77년만에 영국인이 윔블던 남자단식에서 우승했다'는 말이다. 올림픽 테니스 남자단식에서 딴 금메달 두 개도 전부 영국의 메달이 된다,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그런 것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라는 나라에서는 한 국가에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을 각각 대변하느라고 대통령이 셋이다. 근데 이렇게 한 국가에서 같은 citizenship을 공유하지만 같은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 하는 이유는 ethnic한 구분 때문인 경우가 많고 종교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다시 확대하고 중국식으로의 교육개혁에 반대하는 홍콩사람들은? ethnic group 측면에서는 중국인이나 홍콩인이나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같은 정체성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nation-state는 유럽에서 근대적 국가의 형태로 생겨난 형태다. 이상적 민족국가는 국가 하나에 민족 하나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이 동질성을 만들기 위해 공교육을 실시한다. 이 공교육이 실시되는 범위 안에서 같은 언어, 같은 역사와 지식을 공유한다. 한국은 어쩌다보니 중국 같은 나라를 옆에 두고도 ethnic한 특성도, 언어도, 문자도 동화되지 않고 특이하게 독자적으로 유지가 됐다. 얼추 통일신라부터는 중앙집권제 왕정이 조선까지 계속 이어진 데다가 세종 대에 4군6진이 그어진 뒤로는 국경도 변동이 거의 없었다. 물론 북쪽의 다른 부족, 또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남방계 이주민 후예도 있었겠지만 그냥 원래 한반도 살던 사람들에게 섞여 들었다. 그러다 일제감정기와 함께 갑자기 여기에 더해서 근대적인 민족정체성을 갇게 되어버리면서 세계적으로는 드물게도 비슷하게 생겨서 같은 말하고, 같은 글 쓰고, 같은 음식 먹고, 같은 옷 입는 공동체가 동시에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네'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nation-state를 민족국가로 people은 인민으로 citizenship을 시민권으로 번역하는 nationality와 ethnicity를 구분하는 공부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하긴 하지만 한국은 특이한 경우라서 사람들이 되게 자연스럽게 한국인이라고 자연스럽게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속성을 ethnicity이자 nationality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면서 인종 차별을 하기도 하고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최근에 읍내 바벨탑이 세워진 뒤에 외국인들이 한국사람한테 '너희 원주민은 누구야?' 같은 질문을 한다든지 그런 경우를 자주 겪게 됐다. 대체로 영토가 넓고 유럽의 제국주의 식민지배 역사가 복잡한 쪽에서 그런 질문을 하던데 그쪽에서도 한국은 원주민이 한국인이라는 대답을 이해 못 하고 한국인들도 '당연히 한국에 한국인이 살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이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이해 못 하는 상황이 보여서 이렇게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면서 길게 써봤다. 교양 수업 한 토막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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