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86세대는 30대에 정치권에 등장하여 386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구민주계가 너무 미웠던 일등신문 등은 이들이 얼마 못 뜰 줄 알았는지 처음에는 좀 띄워주는 듯했는데 노무현이라는 아이코닉한 정치인의 등에 업혀 정치권의 전면에서 활보를 시작하자 금세 일등신문을 위시한 전통적 민정당류 기득권 세력의 주적이 되었다.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정작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았으나 자 집단의 지지 속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 사람들을 중용했다.
대학생 때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그 엄연한 사실.
그건 사실 굉장한 일이 맞다. 그 과정에서 글자 그대로 죽어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영화 1987에서 주인공인 연희 역할은 그 당시 일부 대학생이 아니고 다수 대중을 대변하는 역할이다. 영화의 그 마지막 시청 앞 광장의 백만 인파? 정말 1970년대부터 1987년 6월 이전 기간에는 없던 일이다. 그때 운동권은 그런 대중적 지지 속에 투쟁을 하지 못 했고 실질적인 국가폭력의 위협 속에서 끝내 살아남았으며 그 결과 운동권에서 내로라하는 영웅유닛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력은 그 사람들의 후광이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0대에 한 번 영웅유닛이 된 이 사람들은 정치권에 흘러들어간 뒤에도 계속 영웅유닛으로 살게 됐다. 제16대 국회에 원내로 진출한 86세대 운동권의 영웅유닛들은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를 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2000년 5·18 전야제 룸살롱 파문', 일명 '새천년NHK 사건'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오니 세부사항을 또 들먹일 필요는 없고 그냥 거기 있던 사람들의 명단만 살짝 짚어본다. 송영길, 김민석, 우상호, 정범구, 김성호, 김태홍, 이종걸, 이상수, 장성민에 시인 박노해까지. 이 사건 이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죽을 만큼 비난을 받아서 정계를 떠났을까? 물론 지금은 권력의 테두리 저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도 있지만 또 몇몇은 여전히 건재하다못해 선거도 이기고 당 대표 경선에 나가니 마니 그러는 중이다.
|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0006778?sid=100 |
유시티즌은 위 기고문에서 "김민석의원을 비롯한 386 정치인들은 이번 일로 회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라고 했지만 늘 그렇듯 유시티즌의 예측은 틀렸다. 사실상 이들이 이 사건으로 입은 정치적 피해는 별로 없었다. 그저 "젊은 당선자들의 경우 대부분 밤 10시반경부터 12시반경까지 술자리에 참석해 노래방기기로 노래도 불렀다"라며, "문제의 글의 내용과 전체 경위는 다소 다르나 참석자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는 사과 성명 몇 줄로 이 사람들은 잠깐의 수치심, 그리고 나 같은 사람 몇몇의 평생에 걸친 조롱 정도 외에 다른 손해 없이 영웅유닛의 지위를 잃지 않고 계속 정치인생을 살았다. 이때 처음으로 정치권 내 86세대 카르텔 안에 moral licensing이 시작된다.
moral licensing.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Moral licensing is a phenomenon often observed when individuals or organizations, previously held in high regard, veer off course morally. They may attempt to rationalize their actions by relying on their past good deeds, believing that these actions grant them immunity from criticism.
(moral licensing은 과거에 높은 도덕적 평판을 가졌던 개인이나 집단이 도덕적으로 탈선할 때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과거의 선행이 자신에게 비판으로부터의 면책특권을 부여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일등신문이 86세대를 흠집 내고 욕하기 위해서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일부러 골프에 미쳤다는 둥, 이제는 소주는 안 마시고 양주만 마신다는 둥 씨부리던 소리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였다. 그것도 '우리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던 너희의 타락'을 비난하고 싶은 음험한 속내가 드러나는 프로파간다. 하지만 86세대가 정치권 안에서 자리를 잡고 기성화하면 할수록 새천년NHK부터 이 영웅유닛들이 스스로 발행하기 시작한 도덕적 허가증은 점차 그 허가의 범위를 넓혀간다.
위법 또는 불법이 아닌 수준에서는 철새짓부터 마치 야당과 한 팀인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 힐난하기, 당 쪼개기, 범죄 수준에서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위력에 의한 성폭력까지 다양하다. 그걸로 모자라 그런 잘못들로 떠내려간 왕년의 동지들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느라 피의 실드를 치고 그러면서 2차 가해도 서슴치 않는 행태도 수치심 없이 반복된다. 이쯤되면 '이너서클'이라는 라벨은 좀 약소하다. '카르텔'이라고 해줘야 좀 면이 서는 거 아닐까?
그렇게 구명되어 돌아온 카르텔의 일원이 살아 돌아올 때마다 그 이전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처절한 반성을 했다거나 국민 여러분께 사죄 드린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후일담은 어째서인지 기억에 없다. 이제 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과 관련해서 "사과"로 대중에게 인식이 박힌 건 오로지 86세대랑은 관련도 없는 추미애뿐이지 않은가. 탄핵소추안 가결 막자고 본회의장에서 몸싸움하고 절규한 영상자료야 영영 남아 있으나 그 시대를 살아온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고난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요즈음 하루가 멀다 하고 파묘되는 송영길 의원의 노무현 비난 발언 모음집은 그 시대를 실시간으로 지나왔던 늙크크들에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지경이고 겉으로는 대표적인 친노 같지만 솔직히 어느 시점 이후 물음표만 잔뜩 찍히는 유시티즌은...(후략)
겉으로 두드러지는 사건사고, 각종 범죄 같은 걸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86세대가 처음 호명된 시점이 아니라 참여정부 출범이나 제17대 국회 탄돌이들의 등원 같은 시기를 기점으로 잡더라도 세월이 20년이 넘게 흘렀다. 새천년NHK부터 따지면 25년 이상, 좀만 지나면 얼추 30년이다. 그 정도 세월이면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하고 86세대가 기성정치권 안에서 쌓은 업보도 내란순장조만큼은 아니더라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현 10~20대에게는 보호자 세대이고. 그렇다는 건 뭐다? 과거에 뭘 했든지 우선 그냥 기성세대로 보인다는 것이고 moral licensing의 약발이 떨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나마 지금까지 이 카르텔의 moral licensing이 유효했던 건 거대악인 '내란순장조의 존재' 때문이었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신통치가 않다. 무려 상대가 내란을 일으켰는데도. 적이 선명하게 존재할수록 이 영웅유닛들의 상대적 도덕성 우위가 계속 충전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잘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국의 기회주의자 무리는 형태와 전략을 다변화해서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사회를 망치려 드는데 '내가 저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사람입니다'라고 주장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논리가 먹힐 것인지, 현재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분석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자각조차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도, 문재인 정부도 과반의석으로 기회가 있었는데도 실패했고 이재명 정부도 이런 식으로라면 참여정부&열린우리당 시즌2가 될까 걱정이다.
영화 '1987'을 보고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젊은 세대가 민주화의 역사와 정서적으로 공명하고 눈물을 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죽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영정사진을 들었던 우상호가 현실에서는 새천년NHK에서 후배인 임수경에게 막말을 하며 5·18 전야에 여성 종업원까지 동석시켜 술을 쳐마셨다는 사실(물론 후에 저 일을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고 한 적이 있기는 하다.)도 엄연하다. 지금 21세기의 젊은 유권자들에게 '제가 옳은 일을 한 적이 있으니 계속 옳을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뭐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까?
기성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86세대는 왜 그렇게 됐을까?
나는 그 원인을 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한 카르텔로 묶어주는 끈의 상당부분이 여성혐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성혐오에서는 한국의 모든 정파를 초월하여 남성기득권이라면 서로 결합할 수 있다. 남성 기득권 카르텔의 젠더 감수성, 퀴어혐오 및 각종 소수자혐오와 차별에 대한 인식수준은 좌에서 우까지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느냐, 그냥 흉한 꼴을 드러내느냐의 차이일 뿐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86세대 남성 기득권 카르텔은 지금까지 moral licensing만으로도 자기들의 정치적 기득권 유지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진보적 가치를 표방할 필요조차 못 느꼈던 것이다. 그동안은 그 영웅유닛들이 20대 때부터 맞서 싸워왔던 민정당 세력과 싸우기만 해도 자리보전이 가능했고 그러다보니 내부의 여성혐오, 약자혐오,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아왔다. 운동권 시절부터 여성운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진정한 투쟁'은 독재정권에 맞서는 것이라고 했던 데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안/못 했다.
86세대 남성 카르텔의 이런 행태는 전형적으로 강약약강을 패시브로 하는 식민지 남성성, 김첨지식 가부장의 모습이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는 집밖에 나가 인력거꾼이 되면 돈을 많이 주고 일은 덜 고된 승객을 위해 주저없이 굽실거리지만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언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86세대도 대외적으로는 검찰과 수구언론, 내란순장조와 맞서고 투쟁하다가 때론 굽히고 배신을 하기도 하는 정치행위를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자신들끼리의 권력관계, 의사결정 구조를 유지하면서 여성, 장애인, 소수자는 들러리 역할 정도만 준다. 주요의제에서 슬그머니 배제하고 내부의 성인지 감수성은 내다 버린다. 자신들과 여성혐오를 공유할 수 있는 남성 후배들한테는 또 가끔 너그러운 척 마이크를 줄 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개혁을 요구하는 소수자 집단에게는 표만 받아 먹고 입 싹 씻기가 지난 20여 년 간 반복돼 왔다.
중도 외연 확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중도 외연 확장은 '민주당이 괜찮으면 민주당 찍을 수도 있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정책을 짜주는 것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보여야 할 것은 더 왼쪽으로, 진보의제를 적극적으로 포섭하더라도 그게 공공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더 많은 시민에게 유익하며, 나아가 그게 '옳다'는 만족감까지도 제공할 수 있어야 진정한 수권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쏟아지는 수많은 비판 속에서 내부의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진보적 어젠다 세팅 능력 상실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철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년 코호트 무지화와 기회주의 세력의 끈질긴 역습에 무방비로 당할 수 있다. 나는 이 실패를 또 겪고 싶지 않다.
끝으로, 유시티즌에게 몇 마디 하고 싶다. 유시티즌은 상대가 DJ이여서 섹시하게 '하야하라'는 말을 쓸 수 있었지만 선거에서 이긴 적이 드물고 지금은 그저 '작가'에 불과하시니 '촉법'도 '용역'도 '평론가'도 아닌 나는 애석하게도 노잼을 감수하고 이렇게 말씀 드린다.
'절필하고 어디 산으로 들어가 자연인이라도 되시라. 유튜브에 좀 고만 나오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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