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를 통해 국회의원 보좌진이 겪는 기기괴괴 썰을 내가 체험한 버전, 영감의 유형 버전, 실제 사례 버전으로 여러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의원은 압도적인 갑, 보좌진은 엄청난 을이어서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요구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며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는 극히 어렵다. 당연히 우리 모두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급자에게 하고픈 말을 다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필이면 나의 직장 상급자가 '국회의원'이고 보면 특히나 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쉽게 입을 떼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실제로 한국에는 제도적으로 이러한 고충과 불만을 제기할 만한 창구가 없다. 일반 공무원이 인사·조직·처우 등 직무조건이나 신상문제와 관련해서 고충이 있을 경우에는 국가공무원법에서 정하는 고충처리절차에 따라 심사청구도 할 수 있고 신고도 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과 보좌진은 '특수경력직공무원'이어서 이 조항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국회에도 '국회인권센터'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다. 인권상담 및 인권침해 신고 및 조사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인권센터는 인권침해의 가해자가 국회의원인 경우에는 조사권한이 없다. 그래서 그나마라도 뭘 하려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국회에는 보좌진에 대한 국회의원의 갑질이나 괴롭힘을 금지한다고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윤리규범이 없다. 물론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이나 국회의원윤리강령은 있지만 이거 내용은 그냥 바른 말 고운 말 아름다운 추상적인 말이다. 그리고 어겨봤자 뭐가 없다. 국회의원에게 괴롭힘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이걸 엄정히 조사하고 제재 또는 징계할 체계가 없다.
국회의원의 문제를 심사하는 건 오직 국회윤리특위인데 이것도 비상설특위다. 특위 구성조차 안 되어 있어서 무려 60만이 넘는 시민이 징계를 요구한 룸준석이 여태 희희낙락인 것이다. 사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여러 나라 의회가 다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영국에서 도입한 제도가 있어서 이걸 한국에도 만들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테레사 메이 총리 시절인 2018년에 만든 '독립적 불만 고충 처리기구: The Independent Complaints and Grievance Scheme (ICGS)'이다.
| 사이트 캡처 https://www.parliament.uk/about/independent-complaints-and-grievance-scheme/ |
이 기구가 생기게 된 배경은 놀랍지 않게도 바로 미투운동이다. 한국은 미투고발이 이어지니 유력 정치인들부터 나서서 고발자를 꽃뱀 취급하기 바빴는데 이 당시 언론에서도 의회 내에 만연한 성폭력을 앞다퉈 보도했고 테레사 메이 총리를 비롯해 각 당 대표는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초당적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의 활동결과로 나온 보고서에서 의회 내 성폭력 문제가 본질적으로 수직적인 권력 관계와 성 불평등, 조직문화의 폐쇄성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하고 독립적 고충처리 제도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고 한다.
ICGS는 거창한 의회 내 윤리의식 고취 같은 걸 표방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진짜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부당한 업무 지시, 불공정 행위를 경험한 사람이 신고하면 독립기구인 ICGS가 철저히 조사하고 제재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당사자뿐 아니라 목격했으면 신고를 권장한다. 다같이 조직문화를 좋게 만들어간다는 의미도 있다.
| 위의 캡처와 동일한 페이지 |
ICGS는 의원을 대상으로 한 신고는 독립적 외부 전문가 패널(IPE)이 조사하고 의원 징계 수위를 권고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2020년부터 하원에서는 의원이 신고 및 조사대상인 경우에 ICGS의 IPE가 권고한 제재수위가 경미한 경우에는 의회의 별도 승인 없이도 바로 집행할 수 있는 징계결정권을 승인했다. 정직 또는 제명과 같은 중한 제재의 경우는 윤리위의 별도 심사 없이 바로 본회의에 표결을 거치도록 하는데 거의 그대로 가결이 된다. 게다가 '사과명령'에 따라서 사과를 했다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사과를 해놓고도 그 뒤에 시켜서 한 것이라는 둥, 진정성이 의심되는 행동을 한다면 추가로 제재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실효적인 제재가 가능한 기구가 있다보니 2024-2025 회기 1년간 피신고 집단 중 의원 비율이 꽤 높다. 하원의원 28%, 상원의원 13%에 달한다.
지난 번 강선우 의원 사례 때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국회의 영감 중에 과연 몇이나 강선우 의원의 행동이 잘못된 거였다고 진심으로 생각할까?'였다. 다들 아마 자각조차 못 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적인 용무를 처리하는 데에 보좌진을 부렸을 것이며 상당수의 남성 의원은 본인은 꿈에도 깨닫지 못할 언어적 성폭력이나 여타의 행동을 이미 수없이 했을 수 있다. 그게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서로서로 심사할 수 있을까? 룸준석이 대선후보 토론에서 뱉은 그 언어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 줄을 피부로 느낄 영감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국회의원실이라는 몹시 폐쇄적인 환경과 영감과의 너무 밀접하고 동시에 너무 생사여탈권을 일방이 틀어쥔 지독한 상하관계 때문에 보좌진은 진짜 더럽고 아니꼽고 불쾌함을 느끼고 부당하다는 것을 아는 요구를 받아서 괴롭거나 곤란할 때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이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 한국에서 제도 개선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한국의 국회에서도 ICGS 같은 독립적인 기구의 필요성을 느낄까 말까 조금 가능성의 여지가 있게 되는 것 아닐까?
근데! 윤리특위가 구성조차 안 되고 있는 현실이니 독립기구에서 고충을 조사하고 제재를 한다는 건 꿈 같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진짜 좀 해야 하지 않을까? K-민주주의가 어쩌고 하는 대한민국 국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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