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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애국자가 절대 아닌데

근데 정말 국회를 좋아했다. 


국회에서 일하는 게 정말 좋았고 일하는 동안 내 나름의 하찮은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는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든 잘 하고 싶었고 잘 알고 싶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잘 가르쳐주지 않아서 혼자 배우러 다니고 혼자 물어보고 알아보고 도움을 청하고 그래서 더듬더듬 일을 했었다. 

일을 잘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은 다 '국회'라는 것의 권위를 무겁게 인식하는 사람들이었다. 난 권위주의는 못 견디지만 권위 자체는 애호하는 편인 그런 인간이다. 국회라는 그 권위. (사실 더욱 강력해야 할 권능.) 

생각해보면 어찌 무겁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국회의원은 모든 시민이 준 표를 받아서 온 사람들이고 선거에 참여해준 모든 시민을 대표해서 국회에서 토론하고 협의하고 합의하고 의결하고 표결한다. 그리고 나는 불가촉천민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런 국회의원을 보좌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능력을 다 발휘해서 일하는 사람들인 보좌진의 한 명으로 나 자신을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의 무거움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영영 국회의 기록에 남는다는 것도 꽤 중대한 일이고. 그래서 사실 거기서 일하는 동안에는 국회와 연관된 사무 외에 여타의 공적인 활동은 기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었다.(결국 사적인 sns 때문에 잘렸으니 상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비겁할 정도로 뭔가 나 자신의 행동 하나조차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란날 밤에 본청을 사수한 국회사무처 직원, 당직자, 의원 보좌진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서로서로 말한 적은 없었어도 국회라는, 흔한 말이지만 진짜 '민의의 전당'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법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공동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랬을 것 같거든.

피디수첩에서 "부대 출동했지? 너희 어디 부대인지 우리가 다 찾으러 갈 거야!"라고 분말소화기를 쏘고 소화전 호스로 물을 쏘며 총을 든 계엄군에게 저항하던 보좌진의 외침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장면에서 속수무책으로 그냥 눈물이 터졌다.


비록 지금은 소총을 상대로 맨손으로 싸우다 밀릴 위기라서 분통을 터뜨리는 중이지만 내가 이 상황이 지나면 원래 하던 대로 싸워줄 거다, 하고 큰 소리 치는 것이다. 보좌진이라는 사람들이 원래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그런 방식이니까. 공무원이 제대로, 법대로 일하지 않으면 누가, 어떻게, 누구 지시로, 어떤 규정에 의해서 그렇게 했는지 따져 묻고 질책하고 제도가 틀렸으면 법을 바꾸고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사실 나는 국민의례도 최대한 회피하고 나의 이기적인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면 나라 걱정을 하고 싶지도 않은 '한국이 싫어서' 사람에 가깝고 절대 애국자가 아니다. 내 곁의 이웃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철저한 이념이나 이론으로 단련된 정당인도 아니고 활동가나 공부 노동자도 아니다. 돌아보면 그런 나는 늘 대한민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 뒤에 아우라처럼 도사리고 있는 모든 시민의 대의라는 것이 갖는 그 권위 때문에 국회가 지니는 권위에 순응하여 내 나름의 충성을 바쳤었다. 여기서 하는 일들이 이 시민 공동체의 앞날을 결정한다는 그 엄중함 앞에 체력과 정신력을 갈아 넣어가며 일했었다. 저 날 끝까지 버틴 모든 보좌진도 민주주의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을 때 최후의 보루로 국회만이 남은 상황에서 다 그런 비슷한 마음으로 저렇게 다치거나 최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버틴 것이었을 거다. 여기마저 밀리면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민주주의가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다크투어를 갔다오고나서 그 유리창이 깨진 현장을 직접 보니까 정말 소름이 끼쳤다. 깨진 유리 하나 치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고 하는데 깨져 남아 있는 유리창을 보니 유리창 갯수까지 세어 맞춰 들어온 계엄군의 계획성에 더 치가 떨렸다. 그 날 국회 앞으로 달려가 싸워준 시민과 국회 안에서 끝까지 맞선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살려주신 거 잊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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