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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라는 말은 너무 가볍지만

임은정 검사가 그간 그 숱한, 모난 돌이라는 내부의 시선, 좌천성 인사를 겪어내며 내부고발자로서의 험난한 여정을 걸어오다가 검찰 개혁이 시대적 과제가 된 2025년의 7월에 서울동부지검의 검사장으로 취임했다. 취임사를 듣다가 이건 기록해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옮겨둔다.



사랑하는 서울동부지검 동료 여러분, 2018년 2월, '검찰 내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조사단'에 조사를 받으러 처음 서울동부지검에 출석하며 늦겨울 한기에 마음이 시리고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수사구조 개혁의 해일이 밀려드는 이때, 더욱 시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검찰은 정의와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입니다. 언제나 틀리는 저울도 쓸모없지만, 더러 맞고 더러 틀리는 저울 역시 믿을 수 없기에 쓸모가 없습니다. 주권자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검찰의 권위는 신기루가 됩니다.

검찰은 정확도를 의심받아 고쳐 쓸지, 버려질지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막강한 검찰권을 검찰에 부여한 주권자는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이제 대답을 해야 합니다.

함께 근무할 동료들과 관내 시민들에게 부임 신고를 하며 어떤 다짐을 두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역대 서울동부지검 검사장들의 취임사도 읽어보고 최근 심우정 검찰총장의 퇴임사도 구해 읽어보았습니다. 서글펐습니다. 그 말들이 사실이었다면, 검찰이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맞았겠습니까.

대개의 검찰 구성원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정인과 특정집단에 대한 표적 수사가 거침없이 자행되었고, 특정인과 특정집단에 대한 봐주기가 노골적으로 자행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검찰은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정의와 공정을 외쳤습니다. 김학의 전 차관의 긴급 출국금지 사건 등 표적 수사 의혹이 제기된 사건의 숱한 피고인들은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고, 검찰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사법 피해자들 앞에 우리가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검찰 개혁의 파고가 밀려드는 지금도 버거운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은 종종거리고 있습니다. 힘겹게 임관했고, 더욱 힘겹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직 전체로 싸잡아 매도되는 현실에 많은 분들이 억울해하고 허탈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사실을 직시해야 진단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진단이 제대로 되어야 적절한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수년간 지켜보았던 표적 수사와 선택적 수사, 제 식구 감싸기와 봐주기 수사를 이제 인정합시다. 우리는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에게 반성하지 않는다고 엄히 꾸짖어 왔습니다. 우리가 계속 잘못을 부인한다면 국민 역시 검찰을 엄히 꾸짖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검찰권을 사수할 때 집단행동도 불사했고 검찰의 잘못에는 모두 침묵했습니다. 불의 앞에서의 침묵과 방관은 불의에의 동조입니다. 우리 모두 잘못했습니다.

국민은, 우리 사회는, 지금 시대는 우리에게 '잘한 게 더 많다'는 변명이 아니라, 한결같은 법과 원칙, 정의와 공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권자 국민에게 변명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늦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빠른 적기입니다. 해야 하므로 할 수 있고, 결국 우리는 해낼 것입니다.

서울동부지검은 검찰 수뇌부의 결정에 수사관분들이 집단소송으로 맞섰던, 역동성을 간직한 곳입니다. 이런 동료들이라면, 검찰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사구조 개혁의 해일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검찰권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합시다. 서울동부지검은 전국 청을 선도하여 수뇌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지금 함께 해봅시다.

검찰의 변화는, 검찰의 내일은,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변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여러분과 함께, 지금 여기서 그 변화를 이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앞장 서겠습니다. 앞장서서 헤쳐 나가겠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감사합니다.


존버라는 말은 너무 가볍지만 그럼에도 사실이기는 하고 건투를 빈다. 어떤 버텨냄은 버텨냄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버텨낸 끝에 조금 더 확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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