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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배운 것 중에 딱 한 가지 확실하게 남은 것

내가 일했던 의원실에서는 내게 누군가 정책질의 업무를 맡긴 적도 없고 가르친 적도 없어서 나는 모든 걸 더듬더듬 혼자 익혀야만 했다. 처음으로 뭘 했을 때 사수 비스무리한 선배가 조언 한 마디 해준 정도? 나는 늘 정책 업무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고 질의 때 필요한 PPT 만들기, 영감이 손에 들고 질문할 패널 만들기, 보좌관이 넣어달라는 표 만들기 그런 잡일을 먼저 수행해야 하는 불가촉천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에서는 뭔가 커리큘럼처럼 뭘 가르친다고도 하던데 나는 그런 운은 없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냥 나 혼자 다른 의원실 하는 거나 그런 거 보고 헛발질도 해가며 뭔가를 시도했었다. 

참고사진 : 2024년 국정감사 문금주 의원의 질의 장면
질의 내용을 작성하기보다는 저 손에 든 패널 같은 걸 만드는 일을 했었다.

사실 법 전공이 아니니 법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의원실에 들어가게 됐으니 상임위에 대해서도 당장은 아는 게 없고. 여튼 그래서 뭐라도 배워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나는 의정연수원에서 개설하는 보좌진 강좌 같은 걸 많이 들었다. 신입 보좌진 교육, 법제 실무, 선거법 규정 해설 같은 것들이었는데 웬만하면 다 들으려고 했었다. 물론 엄청 일반적인 설명이 많아서 실제로 도움되는 내용이 많지는 않았다. 내가 필요한 건 사실 맞춤 과외였는데 강의들은 항상 학부 개강 첫 시간 오리엔테이션 같은 느낌이었어서. 그리고 또 막상 질의서 작성 실무 과정같이 내가 듣고 싶은 과정은 또 바빠서 들을 수 없을 때만 개설되고 그랬다.

그러나 그 모든 강의 중에 딱 하나 지금까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게 남아 있는 강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왜냐하면 2009년부터 국가회계에 발생주의+복식부기 원칙이 도입, 적용되면서 국회에서도 이에 대한 교육이 한창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잠깐 간단히 발생주의와 복식부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1) 현금주의와 발생주의

- 말하자면 국가재정을 가지고 회계장부를 작성하는데 어떤 한 이벤트를 작성함에 있어 그 이벤트의 발생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현금주의와 발생주의의 차이가 발생한다.

- 한국은 국가회계에 2008년까지는 현금주의를, 2009년부터는 발생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 현금주의란 딱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이벤트의 발생시점을 '현금이 들고나가는 시점'으로 따진다. 현금이 유입되어야 수입, 현금이 유출되어야 지출이다. 예를 들어서 정부가 세종정부청사에서 사용할 A4용지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계약을 공급업체와 체결했다고 하자.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서 계약도 하고 몇 월 며칠까지 물품을 인도 받기로 하고 대금은 물품 검수하여 하자 없음을 확인한 뒤에 지급하기로 했다. 이 경우 현금주의 회계에서는 실제로 이 A4용지를 구매하기로 계약을 하든, 납품을 받든 그런 시점은 전혀 회계기준에 중요하지 않다. 실제 재정에서 대금이 지출되는 그 날을 기준으로 '몇 월 며칠 - 지출(물품대) - 일반예산' 같은 식으로 이벤트를 기록한다. 


- 발생주의는 반대다. 현금이 실제 드나드는 날짜가 아니라 그 출납을 하게 된 원인이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이벤트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가령 위에서 든 예시를 기준으로 하자면 계약이 체결된 날에 미지급금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다 실제 지출이 일어나는 날에는 미지급금에서 지출 물품대 쪽으로 카테고리를 옮겨주면 된다. 이렇게 하면 기록 누락을 예방할 수 있고 채무 관리가 용이해지는 장점이 있다.

2) 단식부기와 복식부기

- 단식부기는 쉽게 말하면 단순 기입하는 용돈기입장을 생각하면 된다. 

- 복식부기는 이벤트 하나를 차변(왼쪽)과 대변(오른쪽)에 이중으로 기록하는 방식이다. 기본 원리는 차변과 대변의 금액 합계가 항상 같도록 기록하는 것이다. 

- 그리하야 복식부기에서는 계정과목을 다 합치면 차변합계와 대변합계가 일치하게 되고 '자산=부채+순자산'이라는 대차평균의 원리가 성립된다. 


그래서 이 발생주의+복식주의 회계를 배워서 뭐에 쓰고 있느냐면, 내 가계부다.

이 복식부기의 장점은 기록을 잘못하거나 누락되는 건이 있으면 바로 티가 나서(당장 통장 잔고와 숫자가 맞아지질 않는다.) 정확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 그리고 신용카드를 쓰는 사람이나 대출이 있는 사람에겐 부채 관리를 계획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복식부기 형식으로 가계부를 엑셀에 구현해서 쓰다가 이리저리 알아보니 그런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다. 바로 복식부기 가계부 후잉(https://whooing.com/r/5EES26L)이다! 무료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나는 유료결제를 2048년까지 해놓았다(죽고 싶어도 이때까진 살아야 함). 후잉 없이는 살아가지 못 하는 몸이 되어버렷... 농담이 아닌 게 이제는 단식부기 형태로 금전출납만 기록된 회계를 보면 불안하다. 뭔가를 빠뜨렸을 것 같고 중요한 거래정보를 놓치고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그리고 또 한 번 도움이 된 때는 법인세법 강의 들을 때였다. 결국 복식부기 형태를 이해해야 법인세법 산출도 이해하기가 쉬워지는 거여서 어려운 가운데에서 그나마 좀 회계에 대한 이해 부분은 건너뛰고 바로 법인세법 산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소소하게는 팬질하다가 서폿 넣을 때 회계 관리도 복식부기로 관리하면 중간에 누락이 생기거나 뻑나지 않는다. 

여러 장점이 있다보니까 처음 배울 때 막막한 거,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잘 납득이 안 되는 거 이런 것들만 넘어가면 그 뒤로는 사실 좋은 점이 굉장히 많다. 내가 어느 항목 지출이 많은지 자산은 어떻게 분포돼 있는지, 순자산이 얼만지 이런 것들이 자동으로 집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한 번 배워보면 사는 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복식부기 가계부를 써보시라는 말씀이다. 내게 남은 거의 유일한 국회의 흔적인데 꽤 실용적인 것도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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